얼치기 문장가가 보낸 변명 어린 편지

독자분, 안녕하세요. 언젠가 친구가 내게 했던 말이 기억나요. 자신의 속엣말을 들려준 뒤 이제 너도 이걸 알게 됐으니 더는 자신만의 이야기는 아니게 됐다고 했어요.

그동안 가판대 위에 놓인 책 표면을 두른 출판사의 서평, 추천사, 띠지의 구절에 현혹되어 책이 지닌 아우라를 난 돈을 주고 교환해 왔어요. 여러 장의 종이가 왼쪽으로 겹겹이 묶여서 열렸다가 닫히는 물건에서 뭔가 얻어낼 수 있다는 게 퍽 마음에 들었답니다. 조금만 수고를 들여 그 철자의 조합을 순서대로 내 보조 기억장치로 운반해 저자의 문장을 지니고 있다가 원할 때 꺼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욕심대로 내 쪽으로 끌어온 조각들은 뒤편에 둘테니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해도, 내 생각을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쌓은 뒤 구획 짓고 드러내는 일에는 어림짐작으로 한 판단의 오류를 교정하고 감정을 되돌아보는 일이 곧잘 뒤따랐습니다.

잘 쓰지 못한다는 건, 잘 생각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당신이 잘 생각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당신의 생각을 대신 하게 된다. 일상에서 글쓰기를 차마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강력한 매력을 가진 문장입니다만, 이 문장이 내 마음 한켠에 남긴 미심쩍음을 어떻게 하면 잘 써볼 수 있을까요.

난 글에서 드러내려고 하지 않은 마음까지도 들킬까봐 아직도 전전긍긍해요. 내가 입에 넣고 씹고 삼킨 음식물을 다 소화하지 못한 나머지 방귀 뀐 걸 누군가 눈치채지 않았나 할 때처럼요. 미국 컬럼비아 대학 의학부 교수 마이클(Michael) 거숀(Gershon)의 저서인 제2의 뇌가 1999년 11월 17일 하퍼(Harper) 페레니얼(Perennial) 출판사에서 발행한 이후, 근래에 들어서 한국식품영양과학회와 헬스조선을 비롯한 각종 국내 단체들이 장내 미생물 생태계인 장내 마이크로바이옴의 효과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참고로 적습니다.

오목한 장면들

  • 여기, 내 쪽으로 둥글고 깊게 파인 공간에 누군가 들어왔던 장면들을 적는다.
  • 2020년 4월 25일 23시 53분으로부터
  • 동대문성곽공원의 경사진 보도블럭을 따라 걷다가 평평해진 참이었다. 할머니가 기아 모닝 뒷좌석 오른쪽에서 내린 뒤 문을 도로 닫지 못하고 있었다. 조수석에서 앉은 여자는 일어나는 대신 차창 밖으로 얼굴과 팔을 빼서 그 문을 닫으려 한다. 할머니는 본체만체 손을 휘젓고 뒤돌아보지 않고 절뚝절뚝 걸어간다. 엉거주춤 문을 닫은 여자는 뒤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그 등에 대고 인사말을 건넨다. 나는 순간 눈물이 났는데, 서로 포옹으로 헤어진 다음을 기약하지는 않아도 여전히 애틋한 사이로 느껴서 그랬나 보다.
  • 안녕히 들어가세요. 헤어지고 난 다음 서로에 대한 염려. 편견. 애정. 시선. 다시 만날 때 어깨 두드림, 눈 마주침, 기타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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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P U-7이 음악에 따라 몸을 휘젓는 날 듣는다.
  • 하이샤파 KI-200을 무사히 통과한 연필이 왼손 엄지와 검지에 걸려 떠오른 글자를 끄적거린다. 초등학교에서 줄 노트에 훈련했던 그 순서대로 적기도 하고, 거꾸로 적기도 한다.
  • 유닉스 UNT-8700이 내 머리털을 쓸고 간 지 34일만에 또다시 두피로부터 6mm만 남겨두고 정수리 주변을 배회한다. 신문지 위로 추락한 머리털은 일반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사회 부적응자도 이발을 하니 어엿한 사람의 외모로 보이긴 한다.
  • 평화시장에서 유통된 보라색 양말이 날 신었다. 흰색 프로스펙스 스택스 캡 102가 그 양말을 감쌌다. 종착지인 신발장에서 양말은 날 슬리퍼에게 돌려주다 이내 벗어던진 채로 덩그러니 잠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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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년 1월 4일 11시 30분으로부터
  • 양육자가 무릎을 꿇은 상태로 아이가 입은 패딩의 지퍼를 위로 올려주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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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스스로의 결과물이기도 하고, 주변 환경의 주어진 설정을 좀처럼 거의 벗어나지 못하며 산다. 사회의 제도, 체제, 운동에서 일부 영향을 받는다. 나름 공통 토대라고 여기는 일정 영역을 벗어나지 않고 한계를 띈 미미한 영향을 사회에 끼친다. 생애는 언젠가 멈추며 끝을 맺는다.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쳐다보는 곳으로 나도 여느 사람처럼 잠시 시선을 빼앗기겠지만, 각자는 나름대로 시간을 보내다가 발걸음을 떼며 그 자리를 스스로 떠날 것이다.

    기록적인 흔적은 보자마자

    생각과 기록의 간격이 좁혀졌으면 해서 자주 메모하려고 했다. 내 삶의 여러 단면이 얽혀 적혀진 기록들은 자신은 사실이라며 중얼거린다.지난 기록은 자신을 훑어 읽는 내 손에 팁을 쥐여주며 말한다. 사람을 만나면 무릇 헤어지고 난 그 뒤를 상상할 줄 알아야 한다고. 그 부분을 염두에 두라고.

  • 2022년 1월 13일과 2월 4일로부터
  • 내게 기록하기는 그 내용을 잊기 위해, 그것이 주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적어도 기록은 스스로에게 남기는 증거다. 기록하는 데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있다 하더라도 숙성을 거쳐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고 믿는 정도이다.
  • 텍스트가 하는 가장 궁극적이고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대상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 동대문 10번 출구 옆 신호등을 앞에 두고 짐을 옮기는 노동자들, 몇 개의 플라스틱 파레트와 플라스틱 의자가 겹겹이 쌓여있다. 평일 아침, 신호등의 초록불이 켜지면 그들은 여느 때처럼 많은 사람들을 통과하며 이동한다. 혼란 속에서 지게를 지고 몇 차례 왕복해야 하는 그들은 쌓아둔 짐을 지키면서도 휴식할 공간이 필요했고, 그렇게 신호등 주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이 점유한 자리가 드러낸 삶의 흔적처럼, 내 기록도 느닷없고도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등장된다고 생각한다.

    한낮 꿈을 되뇌일 수 있다면

    내가 아는 햄릿이나 돈키호테는 당신이 날 떠나도 좋고 잊어도 좋다는 노랫말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역부족이다. 머릿속 작전들은 도대체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그 둘이 이래봬도 나도 그리움과 낭만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며 건넨 노랫말. 내 머릿속의 치열한 이 게임이 끝나면 너를 사랑할 수 있을까?

    당신은 날 꿈꾸게 만드는 사람, 내 마음을 망가뜨리는 사람. 내가 하염없이 그리는 당신을 내 나름대로 표현해봤자 불안과 의심이 해소되지 않는다. 실패와 열망의 틈 사이는 강풍을 동반한 집중 호우에 흔들리는 바깥창과 안창의 틈. 바람이 창틀을 흔드는 소리, 빗방울이 유리창으로 돌진하는 소리.

  • 2020년 4월 26일 9시 6분으로부터
  • 낙선에 울지 않고 여러분의 성원과 나라 걱정에 웁니다(미래통합당 이성헌 후보, 2020년 제 21대 총선 서대문구 갑 국회의원 후보)
  • 자기 심장을 따라가는 사람은 친구들이 그만하래도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을 놓을 생각이 없다. 그들은 새로움이 말을 걸어도 바보가 되어 변함없이 그리워하고, 상대가 나를 떠나도 좋고 잊어도 좋다며 심지어 더욱 더 사랑 못한 지난 날을 후회한다고 밝힌다. 만약 그이가 의사가 경고를 거스르면서까지 위험을 감수하고 자기파괴적인 길로 향한다면. 그건 숨막힘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일까, 자신을 구원할 유일한 길로 후회없이 나아가는 걸까, 단연코 얼빠진 파멸로 다다르는 것일까.

    어쩌면 자기 객관화를 통해 다른 통로로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의심과 불안이 누그러질 때까지, 마침내 잠재워질 그때까지 내가 남길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